쿠엔틴 타란티노,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
클라셰의 반복은 작품을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만들기 쉽다. 단, 타란티노의 작품을 제외하고. 감독은 <바스터즈>가 2차대전 전쟁영화들의 조합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무수히 많은 클라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단지 관습적'이라는 평을 면할 수 있는 이유는 고전영화의 여러 요소들이 타란티노의 스타일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 한 케릭터들, 여과 없이 등장하는 고어들, 환상적인 상황설정 등이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는 데 실패하고 있지는 않다.
관객 입장에서 감독이 클라셰를 일부러 삽입했는지, 아니면 감독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클라셰를 사용하게 된 건지는 감독 자신의 고백 말고는 알 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가령 어떤 영화에 로맨스영화의 클라셰가 나온다고 해보자. 감독이 전에 로맨스영화을 많이 보고 로맨스영화의 규칙에 따라 영화제작을 했다면 그건 의도적으로 클라셰를 삽입한 경우다. 하지만 로맨스영화의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로맨스에 가장 적절한 촬영방식을 고민하다보니 얼추 로맨스영화의 일반적인 규칙에 맞는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관객에게는 동일한 클라셰로 보일 것이니, 영상만 보고는 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바스터즈>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2차대전 전쟁영화 뿐만 아니라 고어물, 복수극, 서부영화,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의 클라셰를 차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클라셰들의 차용을 놀랍고 위대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게 의도적인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 것인가? 타란티노와 얘기 해봤냐? 타란티노가 인터뷰를 통해 확실히 밝힌 부분을 제외하고는 답을 내지 않는 게 맞다.
많은 클라셰들의 차용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문제다. 뭘 찬양하는가? 풍부한 영화적 경험? 성실한 기록 습관? 타란티노가 영화광인 건 누구나가 다 안다. 그런데, 그게 찬양할 거린가? 그렇다면 나는 "왜?"라고 묻고 싶다.
타란티노가 찬양받아 마땅한 건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말도 안 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자세히 표현하자면, 타란티노 영화는 초등학교 2학년이 아주 잘 쓴 이야기 같다. 성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말이 안 되지만 아동의 세계에서는 말이 된다. 게다가 한국어 개봉명칭에서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이라고 친절하게 영화명을 설명까지 해주고 있지 않은가. 분명 타란티노를 잘 아는 사람이 정한 게 틀림 없다) , 만화 같은 케릭터들, 유치한 개그들과 고어들... 이런 여러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재미와 통쾌함이다.
그렇다면 이런 작가미학적인 측면에서 <바스터즈>는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스타일리쉬한 액션씬, 단순하기 짝이 없는 케릭터(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들)의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이전 작들과 비교해 볼 때 고어와 긴장감, 유머는 충분하지 않았다. 화재씬은 서스팬스가 부족했다. 차라리 <말죽거리잔혹사>의 옥상 격투씬이 더 긴장감을 줄 정도다. 이 영화에서 고어라고 해봤자 머리가죽 벗기고 방망이로 두개골 부수고 이마에 칼집내는 정도다. <킬빌>의 두부 썰리듯 잘려나가는 신체들을 기대하면 실망한다. 머리가죽 벗기기, 야구 대사 인용하기 등으로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건 좀 아니다. 물론 나도 엉터리 이탈리아어 발음 등에서 뻥 터지긴 했지만, 시시한 장면에서도 미친 듯이 웃어재끼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쥐>에서 박찬욱도 억지 웃음을 유발해서 상당히 짜증나게 하더니, 요즘 세계 거장들의 추세는 다 이런가 싶다. 난 차라리 <킬빌>에서 우마 서먼의 초딩같은 악필이 훨씬 웃겼다.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욕구불만인 나를 더 욕구불만으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적당한 스토리에 적당한 웃음, 적당한 통쾌함, 매우 풍부한 고전 인용과 철두철미 정석에 의거한 연출을 가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이 뜯어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덧붙여서. 정보의 대중화가 어줍잖은 영화평론가들을 양산해 내는 것 같은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 작품이거나 좀 난해한 작품이면 무조건 열광한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자기 만족을 주는지는 몰라도. 열광이라는 반응은 오손 웰즈나 알프레드 히치콕, 제임스 카메룬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충고해주고 싶다)